1. 머리말
조선사편수회의 시작은 일제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
1. 조선사편수회 이전의 관찬사서 편찬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는 의정부 산하에 編史局을 두어 “본국 역사의 편집을 관장”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편 이때 신설된 학무아문에는 편집국이 설치되고 여기에서 “국문 철자, 각 국문 번역 및 교과서 편집 등을 관장”했다. 따라서 의정부 편사국에서
사서는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점이후 조선총독부 주관 하에 이루어졌다. 192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설치된 史書編纂機關으로서 식민사학의 식민통치상의 기능을 밝히는데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에 관한 연구가 요구된다. 이 시간에는 조선사편수회에 대해 알아보겠는데 조선사편수회의 설치와
사상적, 학문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는 일제 관학의 발달과 그 일환으로 관학이 주체가 되어 정책적으로 추진한 식민주의적 조선연구의 강화였다.
일제는 1920년대 중반부터 이를 제도적으로 추진하고 지원하기 위한 관학 연구조직을 체계화하였는데, 1925년 조선사편수회의 설치와 그 결과물인 『조선
사관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고증적 인식을 주로 하는 실증사학으로 크게 분류 될 수 있다.
실증사학계로써 해방이후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대학에서의 후계 양성 등 역사학계를 이끌어 간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던 이병도의 삶과 그의 역사인식의 내용과 한계 그리고 사학사적 의의에 대해서
Ⅰ. 서론(序論)
근대역사학이란 보편타당성을 강조한 과학적 역사와 독립적인 학문으로 정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사일체(經史一體)의 중세사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학문적 독자성을 찾아야 하며 나아가 역사의 주제가 정치중심에서부터 사회경제문화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 확대되면서 ‘인
사의 왜곡과 식민사학의 부식도 이러한 식민통치의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우리민족의 역사왜곡 및 식민사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본문에서는 ‘근대 관찬사서의 변화’와 ‘조선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사편수회‘에 대해서
사학의 비판은 이후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주로 역사왜곡의 시정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는 식민사학의 극복이 학계의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지만, 그 결과 식민사학이 형성될 수 있었던 역사적 상황 즉 식민지배상황과의 연관문제는 소홀히 취급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사편수회는
2. 설립경위와 제국대학 모형의 도입
1) 설립경위
(1) 제 2차 조선교육령 제정과 대학예과 설립
제 2차 조선교육령에서 제시된 학제 개정 의도는 1919년에 이미 조선학제개정안요령이라는 문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의 학제개정 기본방침에서 이미 학제개정은 조선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
사진들에게 실증적 역사 방법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병도는 24세 때 귀국하여 중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31세 때 일제의 어용 기관으로 알려진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였다. 이 때는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이 중국에서 지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던